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3

역사는 과연 진일보하는가?

산중산담 2017. 4. 10. 14:13

 

 

역사는 과연 진일보하는가?

 

 

어제 <오직 정의>가 '루이앤휴잇' 출판사에서 출간 되었습니다.

조선 역사 속에서 이 땅의 정의와 자유를 위해

전 생애를 바쳤지만 반역자나, 아니면 불우한 생애를 살다간 옛 사람들의

삶의 흔적과 사상을 추적한 글입니다.

정도전, 조광조, 정인홍, 정여립, 허균, 박지원, 정약용, 김개남,

김옥균이 이 책에 실린 인문들입니다.

이 책의 서문을 나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일제로부터 강제 합방을 당한 지 106년째 되던 경술국치 무렵, 모 방송국

과 촬영했다. 친일파의 행적과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했던 사람들의 현주소

를 파악하는 방송이었다. 고창과 부안 일대를 돌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 있는 김개남 장군의 묘에서 방송을 마무리할 때, 기자가 나를 향

해 물었다.

왜 친일파 자손들은 지금도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고, 동학군의 후손들

은 어렵게 살고 있습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친일파 대부분은 세도가였거나 잘 사는 집안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들

은 권력과 부의 세습으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고, 그래서 일본 강점

기에도 일제에 협력하며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동학군의 후손은 삼족이

멸하는 관례에 의해 성까지 바꿔가며 살아야 했습니다. 일례로, 김개남 장

군은 도강 김 씨 족보에서도 지워졌을 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 역시 성을 박

프롤로그

역사는 과연 진일보하는가?

씨로 바꾼 채 살아남아 1955년에야 성을 되찾을 수 있었으며, 손화중 장

군의 아들 역시 성을 이 씨로 바꿔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제

대로 된 교육을 받을 리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배움의 끈이 길지

못했고, 제대로 된 직장 역시 갖지 못한 채 하층민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로부터 한 자는 흥하고, 한 자는 망한다.’ 라는 말이 전해오지

, ‘선한 자는 망하고, 악한 자는 흥한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터뷰가 끝났다. 그러자 기자가 나를 향해 다시 말했다.

너무 센데요? 하지만 될 수 있으면 그대로 방송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이라면 불가능지만, 지금은 가능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행히 방송을 보니 그대로 무삭제로 나왔다.

정의를 부르짖다가 역적이라는 오명 아래 죽어간 사람들

역사를 두고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불의와 부패, 부조리와 싸웠던 이들 역시 권력을 잡게 되면 부

패한 독재자가 된 나머지 불의를 신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중에는

목숨을 바쳐 끝까지 정의를 부르짖었던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역적이라는 오명 아래 죽어야 했다. 나아가 그들의 불꽃같은 사상과 신산했

던 삶을 기록한 글 역시 모두 불태워져 사라지고 말았다. 그 결과, 그들은 역

사와 사람들에게 잊힌 존재가 되어 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렇다면, 그들은 정말 실패한 것일까. 역사라는 이름 속에서 영원히 지

워진 존재가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이야말로 질곡 많았던 우리 역사

의 진정한 승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의와 부정, 부조리가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이에 변혁이라는

도화선에 불을 붙인 채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 1589년에 일어난 <기축옥사己丑獄事>1

여 명의 선비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 주인공 정여립은 제자들에게 다음

과 같은 말을 즐겨했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가 임금

자리를 서로 전했는데, 그들은 성인聖人이 아닌가? 또 말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고 한 것은 왕촉王蠋이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이

, 성현聖賢의 통론은 아니다.”

봉건왕조 시대에 어디 될 법이나 한 말인가? 더구나 모든 사람이 평등하

게 살고자 하는 대동사상을 펼치기 위해 대동계를 조직했으니 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림자는 오직 빛이 있음으로써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역시

있음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그 말이 맞는다면 그들의 죽음 역시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역사에 가정이 없는 것처럼 사람의 생애에도 가정은 없다. 하지만 그들이

좀 더 오래 살아남아 새로운 개혁 사상과 정치를 펼쳤더라면 세상은 눈부

시게 변했을지도 모른다.

혼돈의 대한민국, 과연 정의는 살아 있는가

그윽이 생각건대, 털끝만큼 작은 것이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금 이를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말마따나 오늘의 시대는 어디 한군데

성한 곳이 없다.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분단국가, 그래서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리

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그런데도 지도층은 자기 자신과 자기 계파

만 잘 살면 된다는 논리로 팽배해져 있다. 그 결과,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자

주 일어나 국민을 혼란 속에 몰아넣곤 한다. 이를 지켜보는 우리의 마음 역

시 편할 리 없다. ‘가고 오는 우주의 섭리처럼 그럭저럭 굴러가리라고 자위

해보지만, 과연 이 나라가 정말 괜찮은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

쩔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역사는 점진적으로 진보한다.’ 라는 것이 정설이라면, 지금 대한민

국에서 일어나는 일 역시 조금씩 진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리라.

리고 그렇게 되기까지는 정의를 부르짖다가 목숨을 잃은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수많은 이들의 힘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역사 속

의 진정한 승자는 한 시대를 변혁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했지만,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꿈을 접은 채 크나큰 좌절과 절망 속에서 숨

져 간 그들일 것이다. 이에 그들을 역사 속에 승자, 나아가 선각자라는 이름

으로 자랑스럽게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조선 건국 이래 6백 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 권력을 단 한 번도 바꿔

보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고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고 할

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들은 혹은 그런 진리를 내세워 권

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해야 했고,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

滅門之禍를 당하고, 패가망신敗家亡身해야 했습니다. 이에 6백 년간 부귀영

富貴榮華를 누리고자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 어

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

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며, 외면했습니다.

눈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이나 부지하면서 밥

이나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백 년의 역사. (중략) 이제 우리는 이 역

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부패하고 불의한 권력에 당당하게 맞설 때야만 비

로소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

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는 고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의 일부로 정의가

살아 숨 쉬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일성一聲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은 어떠한가? 정의가 살아 있고, 부조리가 없으며,

정부패가 없는 평등한 사회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

다면 역사는 진일보하는가?’ 라는 말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온전한 땅, 전주에서 신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