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3

십 년을 같이 산 시어머니 성을 모른다.

산중산담 2017. 4. 10. 14:26

 

 

십 년을 같이 산 시어머니 성을 모른다.

 

 

여행이라는 것이 그렇다. 어떤 곳을 가는 것도 중요하고 날씨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과 같이 가는 가이다. 여행을 통해서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 땅을 살다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세상의 진풍경을 보는 것도 좋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온갖 사물을 만나고 내가 나를 만나는 것, 그것이 여행의 묘미다.

그런데 서른 두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열이틀을 보내야 하는데, 서로 인사도 나누지 않고,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나의 생각이고, 일부 사람들은 그냥 익명으로 하는 여행을 좋아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스페인, 포르투칼, 모로코 세 나라를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닌 열이틀을 답사하고서도, 누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성은 무엇이고,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돌아다니다가 온 것이다.

우리 속담에 십 년을 같이 산 시어머니 성을 모른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인생 역시 풀어서 말하면 여행이나 진배없다. 길다 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여행 속에서 만난 사람들 때문에 인생의 여행이 더 풍요로워지고 깊어진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하여간 여행을 통해서 나는 세상을 배우고 나 자신을 키워왔다. 그 여행길에서 배운 느낌 중의 하나를 오래 전에 걸었던 <동해 트레일, 오늘날 <해파랑 길>이라고 부르는 그 여정을 처음으로 걸은 뒤 썼던 책에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재미난 일도 많았다. 아흐레 일정으로 예정된 동해트레일을 휴가 차 온 사람은 느긋하게 한가로운 걸음으로 걸었던 도반도 있었고, 마치 극기 훈련이라도 치를 자세로 참가한 도반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일행들은 마치 물과 기름의 조합처럼 서로 융합되지 못해 어색한 모습들을 연출하였다.

천천히 걷지 뭐하겠다고 저렇게 빨리 걷지?”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왜 따라붙어서 일정을 느리게 하지하고 투덜거리더니, 나중에는 급기야 인시도 나누지 않고 각자가 따로 놀았다,

이런 일이 장거리 도보답사에서는 자주 일어난다. 우리보다 먼저 도보답사를 떠났던 스트빈슨의 말에서 길 걷기의 괴로움, 길 걷기의 미학美學과 난처함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도보여행 진미를 몰라서인지 느림보 걸음을 걷거나, 아니면 서로 5마일의 속보速步를 꾀한다. 만보漫步와 속보를 싸움 붙여 놓고, 중간 속도 어부지리를 취할 줄 모르며, 저녁 도착만을 위해서 하루를 걷고 다음 아침 출발을 위해서만 밤을 보낸다.

특히나 속보 자는 이점을 모르니 딱하다. 그들은 퀴라소(서인도제도 퀴라소 원산의 오렌지 향료가 든 달콤한 술)를 대폿잔으로 마실 수 있는데, 남이 위스키 잔으로 마신다고 역정을 내는 것이다.

작은 잔으로 마셔야 보다 미묘한 제 맛이 나는데도 믿지를 않는다. 너무 먼 길을 걸으면 감각이 마비되고, 지칠 뿐인데,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녁에 숙소에 다다를 땐 오관五官이 서리를 맞은 듯 굳어 버리고 가슴엔 별 없는 어둠이 깔린다. 적당히 걷는 자의 훈훈한 저녁 기분을 바랄 수도 없다.

어서 취침 시간이 되어 곱빼기 술잔을 들이켜고 잠들어야 할 육체적 피로가 남을 뿐이다. 애연가라 할지라도 파이프 담배 맛이 떨떠름하고, 제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행복을 얻으려고 배나 노력을 하고 나서, 결국 행복을 놓치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남보다 멀리 가고도 헛수고를 하는 속담에 나오는 인물이라 하겠다.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그렇다 하여도 습관이 오래되면 천성이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미 빠르게 혹은 느리게 길들여 진 사람들이 단 며칠을 걷는다고 그 습관을 바꾸겠는가.

얼음과 숯불은 한 그릇에 담을 수 없다(冷炭不同器).”라는 <한비자韓非子>를 떠 올리며 식당에 들어갔다. 이번 일정에서 갖는 마지막 만찬, 서로 아는 체도 하지 않고 밥을 먹고 헤어지고자 하는 사람들을 둘러 앉혀 놓고, 맥주 한 잔 씩을 돌리고서 장 루술로의 시를 인용하였다.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부산에서 울진 후포까지 우리가 아흐레를 걸었습니다. 그 동안 어떤 사람들은 천천히 걷고자 했고, 어떤 사람들은 빠르게 걷고자 했습니다. 비록 그 모습이 서로 다르긴 했지만, 이번 도보답사를 시작하며 각자가 마음에 세웠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같이 먹고 자며 사흘 정도 길을 걷는다면 그것이 삼년을 같이 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데, 우리는 아흐레를 걸었으니, 삼년보다 더 긴 9년의 세월을 같이 산 것이나 같겠지요. 요즘 세태가 서로 만나 일 년을 함께하기가 쉽지 않아 삼년이라는 세월조차 길게 느껴지는데 우리는 9년을 같이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건너왔다니 정말 대단한 인연이지 않습니까? 사흘도 아니고 닷새도 아니고 9일을 동고동락하며 함께 걸었으니, 설령 좋지 않은 감정의 여운이라도 있거들랑 다 털어버리고 술 한 잔 나눕시다.“

신정일의 <동해 바닷가 길을 가다>1구간 끝부분의 일이다.

이렇게 마무리를 하고 헤어진 사람들이 그 후로 다시는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그 후로도 관동대로, 낙동강, 한강, 금강, 등 우리나라 여러 길을 함께 걸은 사람도 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이제껏 만난 사물과는 다른 사물을 만나는 것이며, 내가 나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함께 같이 간 사람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이 관례인데, 이번 여행에서는 명찰은커녕 인사도 나누지 않고, 마치 <묻지 마, 관광>처럼 진행되었다.

물론 요즘에는 서로 익명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이상한 동행이 많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열이틀을 함께 걷고 먹고, 자고 하면서 서로 데면데면 하니, 인사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척도 아니고, 아는 척도 안하면서 여행을 하는 진풍경을 연출한 것이다.

지나고 나니, 그 여행 중에 일어난 일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여기지만. 시간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돌다가 보니 정직 답사의 시간은 짧고, 차타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고 할까?

세상에 좋은 경치를 다 보는 것, 세상의 좋은 사람을 다 만나는 것, 세상에 있는 좋은 책을 다 읽는 것을 이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은 세 가지 일이라고 하는데, 그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 것이 여행이다.

가고 또 갈수록 어렵고 새롭다는 것을 여행을 통해서 배운다.

하지만 돌아오는 그 순간부터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은 그것 때문에 다시 새로운 여정을 준비하는, 내가 우습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나는 떠나서 후회하고, 후회하고서 또 떠나는 그 반복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얼마나 나는 더 떠나고 돌아오고 또 떠날 수 있을까?

 

 

2017222일 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