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6

문득 눈앞이 캄캄할 때가 있다

산중산담 2018. 4. 27. 13:56


문득 눈앞이 캄캄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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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눈앞이 캄캄할 때가 있다.

몸이 아프거나 무슨 큰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떨리고, 답답한 것,

시간의 강물에 내 맡긴 내 삶이 무료한 탓일까?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앞길에 바다가 가로놓여將行有河海

건너려 건너려도 뱃길조차 끊겨있네將涉無舟航

이리 생각 저리 생각 생각만하다가要見我所思

거리에서 방황하네, 나 어디로 갈까?欲往還彷徨

전설에 나오는 돛대도 없네才非傳說楫

세상운수 아직도 까마득하다만世運亦未昌

가만히 몸 숨겨 때를 기다리리라潛光且?命

주책없이 움직이면 화를 받으리니妄動遭禍殃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이달충李達衷<유감有感>이라는 시 전문이다.

살다가 보면 이런 시절이 있을 것이다.

어딘가로 가고자 하지만 갈 곳도 없고,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쌓이고 쌓인 설움과 분노를

다 털어놓을 수도 없는, 그런 때,

그 때가 자신 속으로 무심하게 들어가는 때이기도 하지만,

그 때가 제대로 길을 잃는 때일 수도 있다.

 

길은 잃을수록 좋다.‘

내가 좌우명이라고 말하는 그것이 그때는 사치이자,

거추장스런 걸림돌이 되는 순간이다.

 

길에서 길을 잃고 길을 찾다가 다시 잃고

길 위에서 비바람 눈보라 맞으며 오랜 나날을 방황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자신도 몰랐던 자기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오랜 나날 길을 잃고 헤매었는데도,

나는 다시 길 위에서 길을 잃고 길을 찾아서 길 위에 선다.

그게 내 삶이다. 더도 덜도 아닌 내 삶,

 

자연스럽게 불어오는 바람에 몸과 마음을 맡긴 채

길을 나서면 길이 여러 곳으로 뻗어 있음을 본다.

여러 갈래로 뻗은 길이 어느 순간에 하나로 만나는 것이 보이고,

그 길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서 방황하고 있는 한 사내가 보인다.

그 사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디선가 낯익은 사내,

그 사내가 바로 나라는 것을 안다.

 

그렇게 먼 길을 걷고 또 걸었어도 종점은 아직도 멀기만 하고,

따사로운 햇살 내리 쬐이는 항구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갈 것인가? 나여, 하고 헤매는 길이여!

길은 도대체 어디로 뻗어 있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201844일 수요일